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채준이와 그의 가족 이야기. 또는 그 가족을 둘러싼 이웃의 이야기. 이웃과 공존해야 하는 우리는 이 이야기에 귀 기울어야 한다.
저자는 채준이를 비롯한 여러 인물을 통해 장애를 마주하며, 이해와 공감을 보여주고 있지만 때로는 ‘착한 사람’이라는 착각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채준이가 사고를 당해 죽은 뒤, 슬퍼하는 채아에게 친구 주희는 ‘좋은 의미’(p.42)로 위로를 하지만 채아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는다.
“채아야, 그만 울어. 운다고 오빠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너희 오빠 불쌍하지만, 그래도 널 생각하면 차라리 잘된 일이야. 안 그래?”(p.41) ‘착한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 아무렇지 않게 차별에 익숙해진 모습으로 생각되는 장면이었다.
또한 채아가 같은 반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연두를 도와주자 연두의 엄마는 연신 미안하다며 고마움을 표하자, 고마움을 불편해 하는 채아의 모습이 있었다.
그 불편함은 연두가 진짜 ‘미안한 아이’가 되는 것과 동시에 미안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착한 사람’의 배려라는 착각이므로 미안함을 불편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 오빠와 우리 가족이 바라던 건 측은지심 같은 게 아니었어.”
“그래, 특별히 잘해주지 않아도 돼. 그냥 똑같이만 대해주면 돼. 그러니까 나를 대하듯이 연두를 대하면 된다는 뜻이야.”(p.164) 채준이와 가족들은 어떤 세상을 살고 있었을까?
자기만의 세상에서 벗어나 세상과 어울리기 바랐지만, 누구도 다가갈 수 없는 채준이만의 언어는 엄마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채준이를 바라보는 엄마, 엄마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던 채아에게 주변의 진심 어린 응원은 따뜻했다. 하지만 채아에게 응원은 때로는 부담으로 슬픔으로 다가오곤 했다. 말을 잘 듣지 않아도, 어리광도 피우고 싶은 초등학생이었던 채아는 엄마의 희망이 되고 싶지 않을 때도 많았던 것이다. 그런 마음은 오빠의 죽음으로 죄책감과 슬픔이 되었다. 채아는 절친 우빈이가 관심있는 여학생이 연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오빠처럼 연두 역시 교실 안에서 외면하며 지냈던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된다.
장애인 가족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채아는 연두의 모습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채준이와 친형 이상으로 가깝게 지냈던 우빈이 역시 연두의 속도에 맞춰 지내며 그들의 우정을 보여주었다.
채아와 우빈이는 특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장애 감수성’은 연두의 모습 그대로를 바라봐 줄 수 있었고, 세상에 ‘없는’ 연두가 아닌 세상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연두로 만들어 주었다.
장애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 장애 감수성만 인지하더라도 우리는 세상의 모든 연두를 볼 수 있을 것이다. |